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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현판을 훈민정음체로 교체했을 때의 모습 (축소현판 제작후 합성, 한글학회 제공) |
서울 경복궁의 광화문 현판 한글화 논의가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뜨겁게 논의되고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光化)’는 뜻으로 태조 4년(1395년)에 세워졌다. 이후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졌고, 고종때인 1865년 대원군에 의해 복원됐다.
그 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청사에 밀려, 중심축이 틀어지고 자리도 옮겨져 원래 모습이 왜곡된 채 있었다. 일제 때 세워진 광화문은 6·25 한국전쟁 때 다락이 불타는 등 우리 역사의 굴곡만큼이나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있다.
그러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 때 아래 석축은 그대로 두고 윗부분만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됐고 현판은 한문이냐 한글이냐에 논의 끝에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친필로 쓴 ‘광화문’ 한글 현판이 걸렸다.
문화재청은 2005년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필로 쓴 한글 현판을 한자 현판으로 교체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06년부터 광화문의 ‘제 모습 찾기’ 사업이 시작됐고,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한자로 된 현판이 광화문에 새로 걸렸다. 그러나 현판은 몇 달 뒤 갈라지고, 엉터리 복원이었다는 자료가 나오면서 2023년 10월 지금의 현판(검은 바탕에 금색 한자)을 달았다.
현재의 현판은 경복궁 중건 당시 훈련대장이자 영건도감 제조(조선시대 궁 등의 건축 공사를 관장하던 임시 관서의 직책)를 겸한 임태영의 글씨를 복원한 것이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 “지금의 한자 현판을 한글 현판으로 교체를 공개 제안”
광화문 현판 교체 논의에 불을 당긴 건 유인촌 문화체육부 장관이다.
유 장관은 5월 14일 경복궁 수정전 일대에서 열린 ‘세종대왕 나신날 기념행사-세종과의 하루’에서 지난해 10월 바꿔 단 지금의 한자 현판을 다시 한글 현판으로 교체하는 논의를 하자고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현판 교체 7개월 만이다. 이날 유 장관은 기념사를 통해 “(현판이) 당연히 한글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논의에) 불을 지펴 보겠다”고 했다.
또한 5월 23일 열린 ‘문체부 정책 현안 브리핑’에서 사견을 전제로 “(지난해 10월 복원한) 현판이 조선시대부터 있던 것이면 보존하는 게 좋지만, 새로 만들어 단 것이니 고증으로 만든 것은 박물관에 전시하고 한글로 다시 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 장관에 이어서 한글학회와 한글문화단체들은 5월 29일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한글로 바꿔 걸라”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김주원 한글학회 회장은 이날 현장에서 “경복궁은 단순한 옛 궁궐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얼굴이자 상징”이라며, “국가유산청은 ‘원형보존 유지 보수’ 원칙에 따른 한자 고집에서 벗어나 미래지향적인 우리 문화와 한글을 후손에 건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단체는 성명을 통해 “세종 임금은 ‘우리나라 말은 중국과 다르다’라는 자주정신으로 한글을 만들었다”면서, “한글이 창제된 장소인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현판은 당연히 한글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글에 대해선 우리 겨레의 자랑이자,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글자라고 강조했다. 전 세계 유행하고 있는 한류가 세종의 한글 창제 정신과 한글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 단체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자를 본따 만든 실물의 절반 크기인 광화문 한글 현판 모형도 공개했다.
그러면서 “한자 현판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인상을 줄 것”이라며, “여러번 불타 다시 세워진 원형 불명의 복제 한자 현판을 떼어내고 미래의 나라 발전과 자주 문화를 상징하는 한글 현판으로 바꿔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국가유산청을 향해서는 ‘원형을 보존’한다는 낡은 생각에서 벗어나라고 주장했다. 학회 측은 “국가유산청은 지난달 문화재청이 고수하던 ‘원형 보존’(복원)이라는 과거 중심 정책에서 벗어나 국가유산을 현대사회에서 활용하는 미래지향적 정책에 방점을 두겠다고 한 만큼, 문체부 장관의 뜻을 받아 한자 현판 ‘門化光’을 한글 ‘광화문’으로 바꾸는 논의를 당장 시작하라”고 거듭 촉구했다. 이들은 8월까지 광화문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국가유산청,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한글 현판 교체 쉽지 않을 것”
이에 대해 주무부서인 국가유산청(문화재청)은 지난 2012년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 ‘원형 복원’ 원칙에 따라 한자 현판이 결정된 만큼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한글 현판 교체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은 7월 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업무보고 자리에서 민형배 의원의 광화문 한글 현판 교체 관련 질문에 “고증과 복원의 원칙은 가장 마지막 있을 때의 원형으로 살리는 게 고증의 원칙으로 돼 있다. 광화문 현판을 바꾸려면 문화유산위원회 의결을 거쳐야 하는데, 국가유산청은 현판 교체와 관련한 심의 계획은 없다”며 반대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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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에서 광화문 현판 한글교체를 위한 1인 시위를 하는 김주원 한글학회 회장 |
●한글학회, “한글현판 교체는 한글주권 회복과 우리 언어문화 발전과 창달에 크게 이바지할 것”
이에 대해 김주원 한글학회 회장은 장문의 의견서를 본지에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화문은 조선 태조 때 경복궁의 정문으로 세웠고, 세종 때 광화문이라 이름지었다. 광화문 현판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때 경복궁을 새로 지으면서 당시 훈련대장이 써 붙인 것이다.
그래서 2010년에 한자로 새로 달 때나, 작년에 한자로 다시 달 때나, 한글학회와 한글 관련 단체는 줄기차게 한글로 달 것을 주장했다. 당시 문화재청은 원형 복원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앞에서 본 대로 참된 원형은 임진왜란 때 이미 없어졌다. 고종 때 훈련대장이 쓴 것은, 원형도 아니지만 6·25 때 없어졌다. 이렇게 광화문 현판의 원형은 이미 존재하지 않으니, 복원이라 표현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상황이 이러하니, 더 이상 원형 복원을 고집하지 말고, 이제는 새롭게 한글 현판을 달아야 할 때가 되었다. 21세기의 광화문 광장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류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로서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한국을 상징하는 핵심적인 곳이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외국인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사진을 찍어 실시간으로 전 세계 친구와 가족에게 보내는 곳이 바로 광화문이다. 세계적으로 인정된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인 한글이 있어야 할 곳이 바로 이곳이다.
때마침 정부는 지난 5월 17일에 문화재청을 국가유산청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와 더불어 국가유산에 관한 정책 기조도 바꿨다. “국가유산기본법을 제정하여 문화유산을 단순히 과거의 유물로 보존하는 것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활용하고 진흥시키며, 동시에 미래 세대를 위해 지속할 수 있게 관리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국가유산청은 밝혔다. 지금까지 한자 현판을 고수했던 문화재청이 그동안 원형 보존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면, 국가유산청은 이제 그 굴레를 벗어나 국가유산인 광화문의 미래 가치를 품고 새롭게 도약해야 할 것이다.
한글학회와 한글 관련 단체들은 광화문 현판을, 국가유산청 발족에 발맞추어, 한국 문화의 미래 가치를 지향하여, 이제는 한글로 바꾸어 달기를 온 마음 다하여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