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제4대 왕(재위 1418~1450) 세종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사실상 왕위 계승자가 될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10년 동안 왕의 셋째아들로서, 평범한 왕자로 생활했던 세종이 청천부원군 심온의 14살 딸과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로 맞이한 때는 12살 되던 1408년이었다.
1418년 6월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두 달 후인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세종으로 즉위한 후 바로 공비로 호칭되었다가 세종이 즉위한 지 14년 뒤인 1432년에야 소헌왕후로 개봉되어 왕후의 책임을 다해야 했다.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아버지 태종은 상왕으로서 군권을 장악하고 국가의 주요 대소사를 결정하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태종은 왕의 권위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숙청을 감행했다.
왕의 인척, 즉 소헌왕후 집안 역시 추후에 있을 화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칼끝을 들이댔다.
소헌왕후의 아버지였던 심온을 가두고 결국 사약을 명해 죽게 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소헌왕후는 순식간에 ‘역적의 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내외적 처신이 훌륭했을 뿐만 아니라 세종과 사이에서 8남 2녀를 둘 만큼 금슬이 좋았던 사이였기 때문에 소헌왕후 본인에게까지는 화가 미치지 않았다.
시아버지의 정치적 노림수로 집안이 몰락했지만 소헌왕후는 묵묵히 세종의 뒤에서 왕비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세종은 왕비의 집안을 지켜주지 못했던 과거의 아픈 기억과 훌륭한 내조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소헌왕후를 끔찍하게 아꼈다.
소헌왕후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자 자식들에게 불공을 명하고 죄수들을 풀어주는 등 신하들이 반대하는 불교적 행사를 밀어붙이기도 했다.
세종 즉위 28년, 소헌왕후가 숨을 거둔다.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차기 왕이 부모의 합장릉을 명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이 직접 합장릉을 명해 자신이 죽고 난 뒤 소헌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바라기도 했던 세종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가모니의 전기를 엮은 석보상절이라는 책을 만들게 하는데 여기에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를 지어 만든 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영웅의 일대기를 그려낸 서사시 구조로 되어 있는데, 전체의 묘사에서 서경이나 서정이 뛰어나고 수사법이 고루 갖추어짐으로써 수려한 서사시로 완결되었다.
조선의 건국이념이 유교였고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세종은 월인천강지곡의 편찬을 밀어붙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대중들에게 훈정음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아직까지 백성들에게 더 친숙한 부처 이야기를 새로 만든 문자로 배포함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죽은 소헌왕후에게 바치는 진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월인천강지곡은 대부분이 낮춤말의 형태로 쓰여있는데 특이하게도 서장에 해당하는 ‘기이’편만은 유독 극존칭을 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세존의 일을 사뢸 것이니
만 리 바깥의 일이지만
눈에 보이는 듯 생각하소서.
세존의 말씀을 사뢸 것이니
천 년 전의 말이지만
귀에 들리는 듯 생각하소서.
만 리 바깥, 천 년 전의 물리적, 시간적 거리를 뛰어넘어 소헌왕후에게 보내는 서정시의 한가락처럼 느껴진다. 기이편의 이 내용을 통해 세종이 월인천강지곡을 만든 이유가 결국 소헌왕후에게 보내는 사모곡(思慕曲)이였다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난 뒤 1446년 9월에 발간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목판본인데, 1447년에서 1448년 사이에 간행된 월인천강지곡은 정음 금속활자로 찍어낸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 특별히 주목하고 싶다.
왜냐하면 고려의 금속활자는 조선 시대로 이어져 금속활자를 만들기 위해 태종은 주자소를 설치하고 세종은 주자소를 이어가며 1434년 기존 활자에 비해 크게 만들어 노인들까지 편하게 책을 읽도록 배려하여 갑인자 20여 만 자를 주조한다.
이 갑인자는 삼강행실도, 소학, 자치통감 등을 간행해 백성들을 깨우치고 가르치고자 하였는데, 유독 훈민정음해례본은 목판본이기 때문이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훈민정음탑건립조직위원회 상임조직위원장
교육학박사 박 재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