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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를 두르듯 산 정상부를 둘러가며 쌓아올린 퇴뫼식 산성 위에 지휘부가 있던 망해루의 건물터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위치한 구봉산에는 당성(唐城,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 사적 제 217호)이 있다. 아직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유적지다.
당성은 한 바퀴를 도는데 1시간 정도 소요되는 작지만 풍경이 아름다운 야트막한 성이다. 당성의 정상에 올라가니 전곡항과 우음도 등 서해의 절경과 태안반도의 산맥까지 보였다.
당성은 '당항성'이라고 불리며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초까지 사용되었다.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퇴뫼형’과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에워싸며 쌓은‘포곡형’을 결합하여 축조된 복합식 성벽이며 1971년 사적 제217호로 지정됐다.
1차성과 2차성으로 나뉘어 있으며 현재 2차성만 복원이 끝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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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성 입구에 있는 당성사적비 |
당성에서 출토된 다수의 명문 기와, 토기와 도기, 중국산 자기 등이 이곳이 대중국 교역의 중심지였음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서해 해안선과 태안반도 산맥을 관찰할 수 있어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집수 시설, 못터, 철덩어리, 관아 건물의 흔적과 온돌이 있는 집터가 발견되어 적지 않은 사람이 이곳에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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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성 '망해루지'의 모습. 대부분은 흙으로 쌓았지만 일부 외벽은 돌로 쌓았다. |
당성은 원효대사(617~686년)가 해골물을 마시게 되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부처의 깨달음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의상대사와 함께 당성을 통해 당나라에 가서 공부를 하는 대신 원효는 자신의 깨달음을 전파했다. 당성은 당과의 문화적 교류에도 사용되었다는 증거이다.
실제로 당성을 통해 중국에서 불교, 유교 등의 선진 문화를 수용했다.
산둥반도와 최단거리인 교역항이였던 당성은 비단과 책, 공예품 등의 사치품을 수입하고 인삼, 금, 은 등을 수출하며 스님과 학자가 이용하는 길목이었다.
신라는 당성을 통한 교역으로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통해 중흥기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중국의 발전된 문화를 받아들여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또한 당성은 전면은 바다로, 후면은 육로 하나로만 연결된 천혜의 요새로 신라의 지속적인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경치가 아름다웠던 화성 당성이 1차성까지 완벽하게 복원되어 중국과 활발히 교역했던 예전 신라 시대의 모습을 되찾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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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연 기자(청심국제중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