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신문은 9호부터 세계적인 프랑스 언어학자 ‘조르주 장’ 교수의 명저 <문자의 역사>를 제1장 초라한 출발, 제2장 신의 발명품, 제3장 알파벳 혁명, 제4장 필경에서 인쇄로, 제5장 출판업자, 제6장 문자해독자 순으로 연재합니다.
지은이 조르주 장(Georges Jean)은 멩 대학에서 언어학과 음운론을 강의했으며 40여 권에 달하는 저자의 저서 목록에는 8권의 시집, 시론과 교육 이론에 관한 에세이, 여러 권의 시선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80년에는 프랑스 재단에서 <언어의 즐거움>으로 상을 받았고, <언어 사이에서>로 루이스 라베 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1995.2.4. ㈜시공사에서 출간되었으며, 번역은 이종인 교수가 하였습니다. <편집부>
인류가 존재한 수만 년 동안 선화(線畫), 기호, 그림 등 간단한 의사소통의 수단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문자가 존재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문자를 사용하는 집단의 생각이나 느낌을 분명하게 재현할 수 있는 공식적인 기호나 상징 체계가 있어야 하며, 이 체계는 여러 사람들 사이에 합의된 것이라야 한다.
이러한 체계는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문자의 역사는 그야말로 오랜 동안 천천히 진행된 복잡한 과정이다. 또한 그것은 인류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며, 아직도 대단히 중요한 에피소드들이 누락되어 있어 전모를 ㅍ악할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문자의 역사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지금의 이라크)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다. B.C. 3000년경 이 일대는 남쪽 수메르 지역과 북쪽 아카드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 역사적 사건을 보존하려는 구체적인 필요 때문에 문자를 만들었다
수메르 사람들과 아카드 사람들은 이 일대에서 평화롭게 살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현대의 영어와 중국어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다. 이들 사회는 고도로 문명화되어 있었는데 바빌론과 같은 대도시 주변에 크고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았다. 공동체는 통치자에 의해 다스려졌지만 종교적으로는 공동체 수호신들의 보호도 받았다. 궁정의 궁신(宮臣), 사제, 상인들을 제외하면 메소포타미아의 주민은 대부분 목자(牧者) 또는 농부였다.
우르크 대신전 단지에서 출토된 진흙판에 새겨진 최초의 문자는 이러한 사실을 설명해 준다. 신전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한 진흙판은 곡식의 포대 수와 가축의 수를 적어 놓은 것이다. 최초의 문자는 농축산물의 수확량을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후대(後代)에 제작된 진흙판은 수메르인의 사회구조를 알려 준다. 예를 들어 라가시에 있는 신전의 종교적 공동체에는 18명의 빵굽는 사람, 31명의 술 빚는 사람, 7명의 노예, 그리고 1명의 대장장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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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크에서 발굴된 이 진흙판에는 가장 오래된 문자가 쓰여 있는데, 제작 연도는 BC 4000년 말 정도로 추정된다. 이 진흙판에는 오늘날의 사전과 비슷한 내용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 |
다른 기록들을 보면 수메르 사람들이 상거래에서 은화(銀貨)를 사용했다는 사실과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는 제도를 도입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메르의 학교터에서 발견된 진흙판에는 한쪽에 선생이 쓴 글씨, 다른 한쪽에 학생이 쓴 글씨가 나란히 적혀 있어 설형문자 쓰는 법을 어떻게 가르쳤는가도 알 수가 있다.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이들이 사용한 최초의 문자는 물체의 단순한 윤곽 이상의 것으로서, 물체의 전형을 간단한 선화로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소’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소의 머리를 그렸고(a), ‘여성’의 경우에는 성기를 나타내는 역삼각형을 그린 다음 그 밑에 점을 찍었다(b). 특정한 대상이나 사물을 가리키는 이러한 그림을 그림문자라고 한다.(그림 참조)
그림문자를 여러 개 겹쳐놓음으로써 생각을 표현할 수도 있고 표의문자를 만들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산’을 나타내는 그림문자 옆에 여성의 성기를 나타내는 역삼각형의 그림문자를 겹쳐놓으면 그것은 산 너머 외부 지역에서 데려온 ‘여자 노예’를 의미했다(c). 학자들은 이같은 원시 그림문자가 약 1,500개 정도 있음을 확인했다.
● 문맥 속에서 더 넓은 의미를 갖게 된 그림문자
B.C. 2900년경 아주 흥미로운 발전이 있었다. 원시 그림문자에서 즐겨 사용되던 곡선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진흙판에 곡선을 그려 넣는 것은 어려움이 많이 따랐고, 그래서 순전히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문자체계가 급속히 발달하게 되었다.
필경사들은 진흙판에 한쪽 끝이 뾰족한 갈대를 이용하여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이나 사물을 그려 넣었다. 수메르인은 끝부분을 삼각형으로 잘라 내 첨필(尖筆:깃촉 펜이나 만년필의 선구)을 만들었다. 그림들은 주로 쇄기꼴을 하고 있었는데, 이 특징 대문에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form)라는 말이 생겨났다. cuneiform은 ‘쐐기’를 의미하는 라틴어 cuneus에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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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귀통이가 둥글게 되어 있는 네모난 진흙판은 B.C. 236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초기 3왕조 시대에 사용된 진흙판의 전형적 형태다. 진흙판에는 농부, 대장장이, 무두장이 등에게 당나귀를 빌려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나귀’를 가리키는 기호는 뒤로 향한 귀와 긴 목과 머리 등으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신’을 가리키는 기호는 오른쪽 맨 밑에 두 번이나 뚜렷하게 나와 있다. |
여러 세기에 걸쳐 설형문자는 많은 변화를 거듭했고, 그 결과 원래 그림의 형체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필경사들이 제멋대로 기호의 형태를 변경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당시의 필경사들이 사용한 것이 분명한 ‘기호목록’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시적인 사전 또는 학습 보조도구라고 해석된다.(계속)